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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소쇄원(瀟灑園)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고향 창암촌에 조성한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일종의 후원(後園) 성격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본원(本園) 그리고 내당(內堂)이 있는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 그리고 오곡문 밖의 후원(後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上下)의 연못, 물레방아(水碓) 그리고 긴 담장인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원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아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제월당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여러 꽃나무가 심어졌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뒤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조성 당시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종으로는 소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종으로는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대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 광풍각, 고암정사, 부훤당, 애양단, 대봉대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옛 모습과 많이 다르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뒤 하늘에 뜬 맑은 달’이라는 뜻을 지닌 제월이라는 당호로서 주인을 위한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빛나는 태양과 시원한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광풍이라는 당호로서 손님을 위한 사랑방 격이다.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 지붕이다.

이외에도 도가적(道家的)인 색채가 풍겨지는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도 보인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록이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에 쓴 한시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제월당에는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사십팔영」의 한시가 판각되어 걸려 있으며, 1755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게한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 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구체적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라 하였으며, 1542년에는 송순이 고종 사촌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민 민간 정원으로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정원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무등산을 유람하고 감회를 기록한 <유서석록>에는 소쇄원에 대한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의 위상과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972년 8월 7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5호로 처음 지정된 후 1983년 7월 20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5월 2일 국가기정문화재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었다.

한국가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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