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정(獨守亭)을 창건한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은 고려말의 공민왕대에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담양 산음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독수정 건물은 1891년에 후손에 의해 재건된 것이며, 1915년에는 떼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1972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신민(全新民)은 계류(溪流)가 흐르는 담양 산음의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後園)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前階)에는 대나무를 심어 고려 왕조에 수절을 다짐했다. 또한 독수정의 방향은 북향(北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침마다 송도(松都)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곡배(哭拜)하기 위함이었다.
독수정(獨守亭)이란 명칭은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곧 “백이와 숙제는 어느 때 사람인가? 홀로 서산에서 지조 지키다가 굶어죽었다네”의 시구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隱士)의 고절(高節)을 나타낸 것이다.
독수정역(獨守亭域)은 진입로에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정(亭)의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독수정 원림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 지붕으로 정면 1칸과 후퇴(後退)를 온돌방으로 꾸몄다. 창호는 띠살창인데 측면은 2분합, 정면은 4분합 들어 열 개로 하여 걸쇠에 걸게 하였다.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가사문학관
(57392)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가사문학로 877.
061)380-2700~3
독수정(獨守亭)을 창건한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은 고려말의 공민왕대에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담양 산음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독수정 건물은 1891년에 후손에 의해 재건된 것이며, 1915년에는 떼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1972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신민(全新民)은 계류(溪流)가 흐르는 담양 산음의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後園)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前階)에는 대나무를 심어 고려 왕조에 수절을 다짐했다. 또한 독수정의 방향은 북향(北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침마다 송도(松都)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곡배(哭拜)하기 위함이었다.
독수정(獨守亭)이란 명칭은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곧 “백이와 숙제는 어느 때 사람인가? 홀로 서산에서 지조 지키다가 굶어죽었다네”의 시구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隱士)의 고절(高節)을 나타낸 것이다.
독수정역(獨守亭域)은 진입로에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정(亭)의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독수정 원림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 지붕으로 정면 1칸과 후퇴(後退)를 온돌방으로 꾸몄다. 창호는 띠살창인데 측면은 2분합, 정면은 4분합 들어 열 개로 하여 걸쇠에 걸게 하였다.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