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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

조선은 교육입국 곧 교육을 중시한 나라였다. 조선시대 교육 기관은 관학(官學)으로 중앙에 성균관(成均館), 지방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사학(私學)으로 서원(書院), 서재(書齋), 서당(書堂) 등이 있었는데, 유독 이곳 담양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구당(學求堂)이라는 명칭의 사립 인재 양성 기관 2개소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수남 학구당은 창평 학구당이라고도 불리며 유교 사회적 기풍 진작과 강학 등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이 학구당의 근원은 원래 고려 말에 건립된 향적사(鄕積寺)라는 사찰 이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척불정책(斥佛政策)에 의해 폐사(廢寺) 된 것을 잣정 마을에 거주하던 창녕조씨 환학당(喚鶴堂) 조여심이 승려들을 다시 불러 들여 강학하였다. 후일 그 제자들이 환학당의 뜻을 받들어 학구당이라 이름하였다. 조선 선조3년 1570년 창평에 살고 있는 25개 성씨(姓氏)가 숭고한 도의(道義)와 국가의 문무정책(文武政策)에 따라 학업을 연마하며, 유교(儒敎)의 기풍을 진작하기 위하여 명칭을 서원이라 바꾸어 중건하였으나, 광해군11년 1619년 다시 ‘학구당(學求堂)’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으며, 현재는 본당 4칸, 문루 2층 4칸, 관리사 3칸이 있으며 현재는 18개 성씨가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구당은 고려시대 불교진흥정책(佛敎振興政策)에 따라 사원 곧 사찰이 건립되었다가 조선(朝鮮)이 건국되면서 척불숭유정책(斥佛崇儒政策)으로 바뀌게 되자, 고려시대의 정치이념(政治理念)을 담은 구조물 등을 없애고, 새로운 국가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맞는 구조물들로 개조, 새로이 건립하여 조선의 유학 진흥 정책을 유지 확립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이런 취지로 학구당(學求堂)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을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를 건립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담양에 소재한 수남․수북학구당(水南․水北學求堂)은 새로운 사회질서에 맞는 형태로 바뀌었던 유적이라는 점에서 당시 정치․사회적 면모를 살피는데 좋은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984년 1월 12일 수남 학구당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호, 수북학구당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지정되었다.

한국가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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